‘꼰대’라는 단어는 꼰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두려운 단어다. 꼰대는 꼰대처럼 되지 않으려 무척 노력하지만 꼰대의 정체성을 찾을수록 더욱 꼰대가 된다. 그렇다면 꼰대는 반드시 꼰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인가? 그런데 누가 꼰대를 꼰대라고 규정하는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의 꼰대를 규정하는 자는 꼰대가 아니다. 꼰대는 젊은이들이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키는 은어다. 지금은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예전에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아버지나 교사를 낮잡아 부르는 단어였다. 분명 부정적인 단어이고 꼰대의 상대적인 단어는 ‘젊은이’ 또는 ‘젊은 사고’이다. 기원전 1700년 전 수메르 점토판에는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당시 사회풍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즘 젊은이의 버릇없음’은 그 후에도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수많은 서양 학자들과 동양 학자들이 남긴 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수천 년을 이어온 ‘버릇없는 젊은이’보다 강력한 뉘앙스의 상대적 의미인 ‘꼰대’가 주목받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꼰대 감별법이 나올 정도로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 젊은이의 사고와 다른 기성세대의 사고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꼰대를 규정하는 지배적인 단어는 꼰대로 지칭되는 기성세대가 ‘경험을 통해서 얻은 개념’이다. 예전에~, 내 경험상~, 해봐서 아는데~ 등등 꼰대의 부정적인 뜻은 경험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런데 과학은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했으며 인류의 역사는 경험 자체다. 이전 세대의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인류의 문명은 발전해가고 사람들은 더욱 풍요롭고 이성적이 되어간다. 경험을 부정하면서 인류의 발전을 얘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꼰대의 경험과 인류의 발전에 필요한 경험은 다른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다르다. 꼰대의 경험은 경험한 그 시대에만 통용되는 경험이다. 현재도 미래에도 통용되는 경험은 꼰대의 경험이 아니라 학문이다. 정류장에서 중얼거리는 노인의 말은 학문이 아니다. 근거를 갖고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며 일반화가 이뤄진 경험이 학문이 된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개념으로 현재의 사건을 판단하고 나이가 들어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 꼰대다. 스무 살에 감동은 스무 살 일 때만 느낄 수 있다. 스무 살 때 추억으로 부르는 쉰 살의 노래는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쉰 살 만이 감동적이다. 같은 이유로 스무 살에 느끼는 낯설고 짜릿한 감동은 스무 살에만 느낄 수 있다. 같은 대상에 대하여 세대마다 다른 감정을 느낀다. 여러 세대가 감동을 공유하기에는 세상이 몹시 빠르게 변한다. 새로운 세대가 공감하는 작품에서 감동보다 어설픔이 많이 보인다면 새로운 세대에 감동을 느낄 여유가 없는 기성세대라는 증거다.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하는 무엇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요즘은 최고를 원하지 않고 하향 평준화되었다.’ ‘젊은 세대가 반드시 잘하는 건 아니다.’는 기성세대의 평가에는 우리나라 문화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에 대한 두려움과 어떤 것이 진짜라고 보여주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미안함이 함께 느껴진다. 어설프고 거친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기성세대의 몫이다.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왜 그래야만 하냐고 묻는 분들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다. ‘무슨 꽃이 필지 궁금하지 않소? 궁금하면 물을 줘야 하지 않겠소!’ 나이가 들어버린 것 자체가 부정적인 요즘은 멋진 꼰대로 살아가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서 현재 우리나라를 만들어준 꼰대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2021/07/26 _이미지 출처 https://www.cowebzine.com/vol528/sub0207.htmlhttps://www.istockphoto.com/kr/search/2/image?mediatype=illustration&phrase=generation+gaphttps://botanical.house/%EC%8B%9D%EB%AC%BC-%ED%99%94%EB%B6%84-%EB%AC%BC%EC%A3%BC%EA%B8%B0-%EB%B0%A9%EB%B2%95-%EC%B4%9D%EC%A0%95%EB%A6%AC/